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 (문단 편집) === 폴란드 공세 === 3개의 전선군이 한창 공세를 진행중던 3월 15일, 드네프르 전역 북쪽에서는 전과확대를 위해 파벨 쿠로츠킨 상장의 제2 벨라루스 전선군[* 1943년 11월 20일에 북서전선군이 해산되고 예비로 빠져있던 사령부로 제2 벨라루스 전선군 사령부를 구성했기 때문에 사령관도 그대로 쿠로츠킨이 맡았다. 제2 벨라루스 전선군은 2월 24일에 만들어져서 딱 이 공세만 진행하고 4월 5일에 해산됐다가 4월 24일에 다시 만들어져 종전때까지 독일 본토로 진격하게 된다.]이 [[폴란드|폴레스스코]]에 공세(Polesskoe offensive)를 개시했다. 목표는 교통의 중심지인 폴란드의 [[코벨(도시)|코벨]]이었다. 제2 벨라루스 전선군은 61군[* 9근위소총군단과 89소총군단을 포함해 8개 소총사단과 1개 전차여단, 2, 7근위기병군단], 70군[* 96, 114소총군단 휘하 4개 소총사단], 47군[* 77, 125, 119소총군단 휘하 11개 소총사단], 7근위기병군단, 6항공군을 보유중이었고 추가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북쪽 끝 13군의 우익 2개 사단도 투입했다. 이 지역에 배치된 독일군은 발터 바이스 보병대장의 2군 좌익의 7보병사단과 헨레 집단, 아그리콜라 집단이었다. 4기갑군의 213보병사단과 코르순-체르카시 포위망에서 탈출한 5SS기갑연대[* 5SS기갑사단 "비킹" 소속]도 여기 있었다. 오토 길레 SS중장의 5SS기갑사단 "비킹"은 재편되어 남부집단군 예비가 되었고 전선 뒤에는 추가로 5개의 헝가리 사단[* 1, 9, 12, 19, 23]도 있었다.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s-4.5|로브노-루츠크 공세]]의 여파로 예비대가 늘어났지만 여전히 빈약한 전력이었다. 여기는 습지대라서 폴란드 공세는 드네프르 전역의 모든 공세 중에 가장 소규모의 작전이 되었다.[* 양측의 기록에 따르면 코벨 전투 기간동안 양측 합쳐 사상자가 15,000명 정도였다.] 3월 4일에 스타브카가 공세 계획을 세우라는 명령을 하달하자 쿠로츠킨은 북쪽부터 61군은 프리퍄트 습지대 남쪽의 독일군을 밀어내고 70군은 [[브레스트(벨라루스)|브레스트]]-코벨 철도를 차단하기 위해 서쪽으로, 주력인 47군은 70군과 평행하게 코벨 방면으로 진격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하여 6일에 승인받았다. 소련군이 공세 일자를 앞당겼기 때문에 시작할 당시 보유한 25개 사단 중 13개 사단만 동원할 수 있었으며 149,400명의 병력과 3,039문의 포, 120대의 전차/자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6항공군도 14기의 [[Yak-9]]과 18기의 [[Il-2 ]]만 동원할 수 있는 상태였다.[* 기타 항공기 90기가 더 있긴 했다. 또한 이러한 항공기들은 눈에는 안 띄어도 정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3월 15일,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70군은 [[https://de.wikipedia.org/wiki/Kamin-Kaschyrskyj|카민-카쉬르스키]]로 47군은 코벨로 진격했다. 16일부터 북쪽에서는 61군이 프리피아트 습지대에 지원 공격을 가했다. 40km를 진격한 소련군은 18일에 코벨에 도달했고 47군 77소총사단은 3개 사단[* 60, 260, 143소총사단]으로 도시를 포위했다. 도시에는 길레가 주변 잔병들을 모아 7,000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코벨 수비대가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신속하게 대응했다. 3월 19일부터 반격을 개시했다. 23일부터는 56기갑군단[* 9군 소속]의 4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사단[* 4, 5기갑사단], 2개 돌격포여단과 1개 중전차대대를 투입했다. 그만큼 코벨은 중요한 곳이었다. 4월 1일, 포위망의 소련군은 6개 소총사단으로 늘어났고 계속 증강됐지만 독일군도 곧 9개 사단[* 4, 5기갑사단 포함]과 5개 돌격포 여단으로 증강됐다. 3월 28일, 4기갑군 좌익의 42군단[* 5SS기갑사단, 헝가리 19사단, OKW 예비인 131보병사단]은 남부집단군에서 중부집단군으로 이동했고 루프트바페도 2개 항공사단[* 1, 4항공사단]을 투입해 일시적으로 근방의 제공권을 장악했다. 4일, 독일군은 4, 5, 5SS기갑사단을 선두로 포위망의 적을 몰아냈고 칼 니콜루시-렉 SS중령[* 상급돌격대지도자]이 이끄는 전투단[* 판터 17대를 보유하고 있었다.]이 5일에 도시의 아군과 연결됐다. 소련군은 최대 50km 서쪽으로 진군하긴 했지만 결국 코벨을 탈환하는데 실패했고 코벨 서쪽에 전선을 구축했다.[* 이후 바그라티온 작전 진행 중에 루블린-브레스트 공세에서 7월 7일 소련군에게 해방된다.] 이는 작전 기간 중 10개의 공세 중에 유일한 목표 달성 실패였다. 독일군은 반격이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했고 소련도 같은 생각이었다. 소련군은 지나치게 지형의 특성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넓은 구역에서 진격했으며 적의 반격 능력을 과소평가해 전과 확대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처음에 절반 정도의 전력으로 공세를 시작한 덕에 공세가 끝날 시점에서는 197,400명의 병력과 4,142문의 포, 191대의 전차/자주포, 181기의 항공기로 오히려 전력이 증강됐으나 추가된 전력들은 공세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했다. 도시 포위전에서 제대로 지휘하지 못한 47군 사령관은 공세 이후 소환되어 문책당했다. 제2 벨라루스 전선군은 제1 벨라루스 전선군과 합쳐졌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로코솝스키]] 휘하의 벨라루스 전선군이 되었다.[* 4월 24일에 다시 1,2 벨라루스 전선군으로 나눠진다.] 그렇지만 이제 소련군은 폴란드에서도 독소전쟁 개시선까지 도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